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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인천

[인천] 이민사박물관 - 개항과 이민

인천 월미도에 있는 이민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월미전망대에 들렀다가 내려와서 이민사박물관에 갔는데요
전망대에서 천천히 걸어서 30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이민사 박물관이라고 하네요
 



관람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 1월 1일, 공휴일 다음날이라고 합니다.
 



인천에 그리고 특히 월미도에 이민사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 이유는,
개항 당시 이곳을 통해서 대부분의 이민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시가 시작되는 위치에는 이민사 연표가 있었습니다.

1860년 북경조약(중국과 러시아 간에 맺은 조약으로 연해지방을 러시아영토로 함) 이후 
러시아는 연해주 개척을 위해 한인들의 입국을 허용합니다.

하와이로의 이민은 1902년 12월 처음으로 시작됩니다.
이후 1905년에는 멕시코로 1,033명이 이민을 떠납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민은 계속되고 광복 이후에도 독일, 미주 등으로 이민이 계속됩니다.



인천은 오래전부터 한반도의 중서부 해안에 위치해 해상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예성강의 입구에 위치한 강화와 교동 자연도 등이 대외 교통의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대외적으로 해금정책을 펼쳐 외국의 선박이 통항할 수 없었지만
1600년을 전후해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강화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어
인천 해안 지역의 군사 방어 시설이 보강됩니다.

19세기에는 서양 여러 나라들의 통상 요구를 저지, 차단하는 최전방 방어 시설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개항 이후 인천은 조선 최대의 무역항이 됩니다.
인천항을 통해 주로 곡물을 수출했고 공산품과 직물, 면제품을 주로 수입합니다.

초기 인천항에서의 무역은 일본 상인들이 독저하다가 이후 청국 상인과 경쟁합니다.
그러나 청일 전쟁 이후 청국 상인들의 입지는 위축됩니다.

영국의 이화양행 (1883년)은 화물 운송, 우피 무역, 광산 개발에 주력했고

미국의 타운센드상회 (1884년)는 증기력을 이용한 정미 공장을 운영했고 석유와 폭약을 공급합니다.

독일의 세창양행(1884년)은 바늘, 염료, 면포, 쇠, 강철, 약품, 기계, 무기 등의 중계 무역을 합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는 계속되는 가뭄으로 굶주림이 계속되었고
서구 열강의 이권 개입 경쟁으로 민중의 삶의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와이로의 이민이 시작되는 배경이 됩니다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은 19세기 중엽부터 조성됩니다.
초기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은 원주민을 통해 공급했지만 중국과 일본의 노동력도 투입됩니다.

1882년 중국인 배척법으로 중국인 노동자의 이주가 금지되고
일본 이민자들이 노동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자
농장주들은 조선인 노동자를 선택합니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미국 공사이자 선교사인 알렌의 주선을 진행됩니다.

알렌과 친구였던 오하이오 주지사 내쉬의 양아들 데쉴러는
한국인 하와이 이민 사업권을 따낸 상태였고
알렌의 추천을 받은 데쉴러는
고종 황제로부터 하와이 이민 사업의 책임자가 됩니다.



고종 황제가 이민을 승인한 이후 여권 발급 등 이민 관련 업무를 답당할 정부의 공식 기관 유민원이 설립됩니다.

유민원의 초대 총재는 민영환이 맡았고
오늘날의 외무부 여권 업무와 해외개발공사의 기능을 합친 역할을 했습니다.



하와이로 떠난 첫 이민자들은 유민원 총재가 발급한 집조(여권)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하와이 이민을 첫 이민으로 보는데
이 때의 이민이 처음으로 추진한 공식적 인력 송출이었기 때문입니다.




1904년 (고종 41년) 11월 19일 발급된 전라도 창평에 거주하던 김만수의 여권입니다

유민원이 발급한 집조는 한 장의 한지를 좌우로 나누어 
오른쪽에는 여행인의 주소, 성명, 연령, 여행 목적 및 목적지와 보증인(1명)의 성명, 주소, 직업 등을 적고 
소지자의 통행에 방해가 없도록 각국 관사에게 그 보호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왼쪽에는 이 내용을 영문과 불문으로 번역해 두었습니다.



이민을 떠날 시점의 인천항 전경입니다.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외래 문물이 전파됩니다.
학교, 병원, 교회 등이 설치되었고 신문일 발행됩니다.
또한, 호텔과 영화관 같은 문화 공간이 등장하고
새로운 음식 문화도 확산됩니다.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입니다

1903년(고종 40년) 8월 6일에 공고되었습니다.

하와이에서 영문으로 작성된 것을 한국으로 보내져 한글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모집 고시의 내용입니다.
하와이의 기후, 복지 혜택, 임금, 근로 조건 등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와이 이민의 모집과 송출에 관한 업무는 미국인 데쉴러가 설립한 동서개발회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데쉴러는 이민자의 재정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데쉴러(Deshler) 은행을 설립하기도 합니다.

초기에는 이민자 모집이 큰 호응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물포위슬리메모리어교회(현재 인천내리감리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존스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그 주변의 기독교인들이 이민을 떠나게 됩니다.



1902년 12월 22일 121명이 인천 제물포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에서 신처검사를 받습니다.
이곳 신체검사에서 19명이 탈락하고 102명이 갤릭 호 (S.S. Gaelic)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다시 16명의 질병자가 발견되어 탈락하고 86명만이 상륙 허가를 받습니다.

최초 이민자들의 출신지는
제물포 67명, 부평 10명, 강화 9명, 서울 7명, 경기도 3명, 나머지가 6명이었습니다.



첫 이민자들의 연령, 성비 구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