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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근대건축전시관 인천 근대건축전시관의 전시 내용입니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본래 일본18은행 인천지점 건물이었습니다. 1890년 세워진 이곳은 18은행이 해외에 세운 최초의 지점이었습니다. 나가사키의 상인들은 상해에 수입된 영국 면직물을 수입해 그것을 한국에 팔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이들의 업무를 지원하고자 18은행 인천지점이 새워졌습니다. 개항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로 배를 대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곳에 선박을 정착시키기 위해 부두를 짓는 공사가 1884년 시작됩니다. 인천항 도크는 1906~1918년 사이에 설치됩니다. 인천항 도크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크이자 당시 동양에서 하나뿐인 도크였습니다. 일본 경도대학 문학부 지리학과가 소장하고 있는 1916년 제1..
[인천] 한중문화관 - 화교역사관 인천 한중문화관 화교역사관에 전시된 내용입니다. 화교사회는 1882년 조선과 청 간의 무역협정이 체결되면서 시작됩니다. 화교는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됩니다. 화인은 현지의 국적을 취득해 중국 국적을 지니지 않은 집단 화교는 중국의 국적을 그대로 유지한 집단 화예는 자신을 현지교민사회의 일원으로 인식하지 않지만 문화적으로 중국으로부터 건너왔다고 생각하는 집단입니다. 한국 화교는 90% 이상이 산동성 출신입니다. 남성 위주의 이주 후 한국인과의 결혼을 통해 가족을 이룬 경우가 많았습니다. 1884년 4월 인천에 청국 조계지가 들어섭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뒤 중국조계지가 위축되었습니다. 1990년대 세계화의 추세와 한중 수교를 계기로 인천은 대중국 교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합니다.
[인천] 한중문화관 - 한중교류사 인천에 있는 한중문화관, 한중교류사 관련 전시 내용입니다. 한중 문화 교류는 기원전 3~4세기 경부터 시작됩니다. 이후 전쟁과 평화로운 교류를 통해 경제, 사회, 문화적 교류가 이어집니다. 냉전기에는 교류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이후 중국이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하며 한중 교류가 급진전됩니다. 장보고는 819년 당나라의 장군이 되었다가 다시 귀국해 신라 왕실의 승인을 얻고 해적과 노예상을 소탕합니다. 장보고는 동북아시아의 해상권과 무역권을 제패해 한중교류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18세기에 등장한 북학파는 청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합니다.
[인천] 한중문화관 인천 차이나타운거리에 있는 한중문화관의 모습니다. 한중문화관 건물은 총 4층으로 1, 2층에 전시실이 있습니다. 연중무휴이고 9시부터 18시까지 관람할 수 있습니다. 관람료 한중문화관 우호도시홍보관에는 중국의 여러 도시로부터 기증받은 물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요녕성 영구시 산동성 청도시 시남구 산동성 치박시 박산구 내화예술로 만들어진 작품 수공유리조각공예품 산동성 제녕시 미산현 중국전통의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습니다. 단체의 경우 미리 예약을 해야한다고 하네요. 청나라 황제, 황후의 의상 명나라 황제, 황후의 의상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인천의 근대문학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인천의 근대문학 관련 전시내용입니다. 인천은 최초로 개항된 항구도시로 외래의 근대문화가 들어오는 통로였습니다. 인천은 근대적 여가와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1917년에는 월미도와 내륙을 잇는 방파제가 완공되었고 1923년 '월미도유원회사'가 설립되어 인천은 관광지로 각광받기 시작합니다. 최찬식의 '해안'(1914), 염상섭의 '이심'(1928), 이효석의 '주리야'(1933), 이광수의 '사랑'(1938) 에 이러한 인천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개항 이후 인천은 공업도시로 발전합니다. '인간문제'(1934), '재생'(1924), '당랑의 전설'(1940)에 이러한 인천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전쟁직후 인천은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도시로 발전합니다. 현대문학은 인천을 배경으..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1945~1948 인천 한국근대문학관에 전시된 1945~1948년 관련 전시내용입니다. 해방이후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정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우익과 좌익의 대립이라는 냉전체제가 형성되면서 문인단체도 좌우로 나뉘게 됩니다. ‘전조선문필가협회’(우), ‘조선문학가동맹’(좌)로 나뉜 문학계는 이후 남과 북으로 많은 작가들이 나뉘게 되는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이 시기 문학은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고, 친일 행위를 반성하거나 당대의 혼란한 현실을 담고,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개성을 다루는 특징을 띄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육사, 윤동주, 박물월, 박두진, 조지훈 등의 시집이 등장합니다. 또한 해방 직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상, 친일 작가의 자기비판, 등을 내..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1935~1945 인천 한국근대문학관에 전시된 내용입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한국 근대문학은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을 받습니다. 각종 신문과 잡지가 폐간되었고 한글 사용도 금지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가족사연대기소설들이 발표되었습니다. 백석, 이용악, 서정주, 오장환, 유치환 등의 시인이 등장합니다. 1930년대 후반 생명파 시인이 등장합니다. 서정주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원죄 의식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동경을 관능적인 이미지로 그려냅니다. 대표작은 ‘화사’, ‘자화상’ 유치환은 현실과 대결하는 생명 의지를 추구합니다. 대표작은 ‘생명의 서’ (1938), ‘바위’(1941) 오장환은 과거의 잘못된 유산과 전통을 부정하는 한편, 항구와 바다 등의 생동하는 공간을 이국적이며 퇴폐적인 이미지로 그려냅니다. 대표..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1925~1935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1925년에서 1935년 근대문학에 대한 전시 내용입니다. 1925년부터 1935년 사이에는 식민지 조선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농촌의 삶과 애환을 다룬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김유정의 ‘봄 봄’(1935), ‘동백꽃’(1936)과 심훈의 ‘상록수’(1935), 이기영의 ‘고향’ (1933), 이광수의 ‘흙’(1932)이 있습니다. 염상섭은 1930년대 장편소설 ‘삼대’(1931)를 발표합니다. 이기영의 ‘고향’(1933)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편 농민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농촌의 생활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강경애는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를 통해 농민에서 노동자로의 변신과 식민지 시대 여성의 삶을 다루었습니다. 한설야는 ‘황혼’(1936)을 통해..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1919~1925년 인천 한국근대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20년대 초반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창조’의 김동인과 ‘백조’의 현진건, 나도형 그리고 ‘폐허’의 염상섭을 들 수 있습니다. 김동인은 과거 시제 및 과거형 종결어미, 3인칭 대명사 등을 소설의 문장에 대입해 근대소설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마음이 옅은 자여’ (1919), ‘배따라기’ (1921), ‘감자’ (1925) 등이 있습니다. 현진근은 ‘빈처’ (1921)와 ‘운수 좋은 날’ (1924), ‘고향’ (1926) 등을 통해 식민지 현실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지식인과 노동자, 농민의 궁핍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나도향은 초기에는 감상적 낭만주의 모습을 보이다가 ‘벙어리 삼룡이’ (1925), ‘물레방아’ (1925)를 통해..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1910년대 인천에 있는 한국근대문학관 1910~1919년도 문학 일본에서 근대문학 수업을 받은 유학생들은 시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최조의 산문 자유시 ‘불놀이’(1919)가 발표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1910년대에는 일제의 검열과 규제 속에서 신교육과 자유연애, 근대문명 예찬 등을 내용으로 하는 작품들이 자리잡습니다. 또한 무기력한 지식인의 우울과 고뇌를 묘사한 단편소설들도 발표됩니다. 외국 문학을 우리 상황에 맞게 각색한 번안소설이 크게 유행하게도 합니다. 1917년 매일신보에 견재된 이광수의 ‘무정’은 1910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이전 소설과 달리 구체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현실성 있는 인물과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최초의 근대 창작 장편소설 ‘무정’ 1920년대에는 3.1운동 ..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근대계몽기 인천에 있는 한국근대문학관에 전시된 내용 중 근대계몽기 관련 내용입니다. 근대계몽기 시(가)는 전통 양식을 계승하면서 발전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시조나 가사처럼 정해진 율격을 지쳤고 내용적으로는 계몽적 성격이 두드러졌습니다. 대표적으로 계몽가사, 창가, 신체시가 유행했습니다. 계몽가사는 전통 가사의 4.4조, 4음보의 리듬에 맞춰 새로운 내용을 담은 형태의 가사입니다. 대표작으로 이중원의 '동심가'(1896), 이필균의 '애국하는노래'(1896)이 있습니다. 창가는 서양행진곡, 찬송가, 일본창가 등의 영향을 받은 3음보 율격의 노래입니다. 대표적으로 최남선의 '경부철도노래'(1908), '한양노래'(1908)가 있습니다. 해애게서 소년에게 (1908년 창간호) 1894~1910 이 시기에는 신소설과 역사전..
[인천] 이민사 박물관 - 1930년대 이후 하와이 독립운동 인천 한국이민사 박물관 기획특별전 새롭게 보는 하와이 독립운동 자료전 1930년대 이후 하와이 독립운동 관련 내용입니다. 재미한족연합회와 주미외교위원부 하와이에서는 국민회와 동지회의 합작 운동이 전개되어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주미외교위원부가 출범합니다. 그러나 재미한족연합회가 이승만의 독단적인 주미외교위원부 운영에 반대하면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됩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위원 (1942) 1944년 11월 2일 미국 우정국이 발행한 우표입니다. 당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침략을 당한 13개국의 저항활동을 기리고 독립운동을 격려하기 위해 제작된 우표중 하나입니다. 하와이 이민자의 상당수는 기독교 신자였고 교회는 한인 이민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합니다. 하와이한인교보 (1909년) 한인교회보 (1..
[인천] 이민사 박물관 - 1920년대 하와이 독립운동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특별전 '하와이독립운동자료전' 내용입니다. 1919-1922년 하와이 독립운동 1920-30년대 하와이 한인들은 평온한 시기를 보냅니다. 한인들의 경제 상황이 전반적으로 좋아져 자녀들을 위해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됩니다. 또한 비정치적인 민간부문의 활동이 활발해집니다. 1937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은 한국 독립운동에 좋은 영향을 줍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주미외교위원부'가 설치되어 협력과 경쟁관계를 맺습니다. 워싱턴 군축회의 참가 실패와 상해 임시정부에서의 지도력 부재로 이승만은 탄핵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이에 이승만은 동지회를 설립하고 동지회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동지식산회사 설립과 동지촌 건설운동을 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실패하고 반이승만 활동이 일..
[인천] 이민사박물관 - 1910년대 하와이 독립운동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특별전 새롭게 보는 하와이 독립운동 자료전 하와이 독립운동 연표 이번 전시에서는 하와이 한인 독립운동사를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고 하와이 한인들의 삶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1903-1909년 하와이 한인사회가 형성됩니다.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들은 각 농장 캠프를 중심으로 동회를 설립합니다. 이후 국력이 쇄약해지면서 하와이 한인사회는 민족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하게됩니다. 하와이지역 동회 현황 초기 하와이 민족운동단체 최초의 합성협회 건물 (1907)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총회장 임정수 (1907) 1909년 안창호 선생이 이끌던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가 통합해 국민회를 창설했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미주 한인 4천여 명을 대표하고 만주, 연해주 등을 포..
[인천] 이민사 박물관 - 미주 독립운동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주 독립운동 관련 내용입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독립운동은 중국과 러시아, 일본, 미주로 확산됩니다. 미주에서는 제1차 한인회의를 1919년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했고 이날 독립선언서가 낭독됩니다. 1919년에 제작된 영문 제목의 독립선언서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해외 한인 독립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국민회입회증서 대한독립운동비 제1차 의연금 증서 (1919) 미주 지역 독립운동은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 지도적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승만은 하와이를 근거지로 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대한인동지회를 통해 외교적 노력을 하였고 안창호는 미주 본토에서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민족 교육적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박용만은 하와이를 근..
[인천] 이민사 박물관 - 남미 한인사 인천 이민사 박물관에 전시된 내용 중 남미 한인사와 관련된 전시 내용입니다. 브라질 최초의 한인 이민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 귀화한 재일 교포들이 브라질에 도착하면서 시작됩니다. 1956년에는 6.25전쟁 여파로 50명의 반공포로가 무국적으로 브라질에 도착하였습니다. 최초의 정착지 라마르케 농장에 세워진 아르헨티나 이민 기념비 도시 한인들의 최초 집거지인 아르헨티나 레따로 빈촌 아르헨티나 최초의 한인 이민자는 6.25전쟁으로 인한 반공포로들이었습니다. 1962년 국교가 수립되면서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남미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다음으로 파라과이에 많은 동포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첫 이민은 1965년부터 시작되었고 일종의 행상인 벤데 업을 개척합니다. 칠레 이민은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