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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전주

[전주] 동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관은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동학혁명의 과정을 자세히 전시하고 있습니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매주 월요일 휴관


특이하게 점심시간이 12시부터 1시까지 있습니다.





이곳은 5가지의 주제로 


동학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도

동학이 시작된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기존 종교 즉 유교, 불교, 천주교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역사책에서 많이 본


교조신원운동


여기서 교조는 창시자 최제우를 뜻하는데요


당시엔  동학을 사교로 보고


그 우두머리인 최제우를 체포하여 처형하였습니다 (1864년)


이에 동학교도들은 최제우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교조신원운동을 펼칩니다.


1892년 삼례집회에서 시작된 운동을


제1차교조신원운동이라고 하는데요



이 집회에서는


동학을 인정해달라

동학교도에 대한 가혹한 세금을 중단해달라

는 요구가 등장합니다.


가혹한 세금을 중단하겠다는 전라감사의 약속으로

집회는 해산되었으나, 가혹한 세금은 계속되었습니다.



이후 40여 명의 교도들은 1893년 2월 8일 상경해 광화문 앞에서 교조 신원을 호소합니다.

이에 고종은 청원을 들어주겠다고 답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주모자를 체포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에 2만여 명의 교도들은 보은에 모여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세력을 배척하여 의병을 일으킨다)

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이를 보은집회라고 합니다.



또한 같은 시기에 금구에서도 집회가 열렸는데


'부패정권 타도, 외세 배격'의 구호가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지배층의 착취

외세의 침탈

등으로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농민들이 봉기하는 시기와 맞물려

일어났습니다.


198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국에서 60여 차례 농민봉기가 발생했다고 하네요.



평화적인 시위와 집회로는 한계를 느낀 동학교단은


1894년 1월 10일 고부(지금의 전남 정읍시 고부면)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혁명을 시작합니다.



1894년 3월 20일에는 무장 여시메봉에서 포고문을 선포하였습니다.



무장기포 이후 백산에 모여 혁명군으로 군제를 정비하였는데요.


이 모임을 백산대회라고 부릅니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창의의 뜻을 천명하는 4개의 행동강령을 선포했는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3. 일본오랑캐를 내쫓아 성도(聖道)를 밝힐 것

4.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권귀(權貴) 를 모두 죽일 것 




당시 전라감사 김문현은 별초군 250명과 보부상으로 편성된 관군을 이끌고

부안관아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게했으나

황토현전투에서 동학농민군에게 크게 패했습니다.



이에 서울에서 경군 800명이 파견되었으나

사기가 저하되어 도망자가 속출해 병력이 반감되었습니다.

이에 800명이 추가 배치되었으나

황룡 전투에서 패배하며 전주성을 점령당합니다.




전주성 점령 10여 일 후 탐관오리를 벌하겠다는 약속에 따라 전주화약을 맺고 동학농민군은 해산했습니다.


전주화약에는 외세 개입의 소식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주화약 이후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던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전라도 53주(읍) 관아 안에 집강소를 설치해 동학교도가 각 읍의 집장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맡도록 했습니다.


전주에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를 두고


집강소 업무는 서기, 성찰, 집사, 동몽 등 임원을 두어 분담하도록 했습니다.



전봉준은 금구, 원평 등지를 근거로 전라우도를 관할하게 했고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로 전라좌도를 관할하게 했습니다.



집강소로 인해 당시 수령들은 형식상 지위에 지나지 않았고


서리들은 동학에 입적해야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안


폐정개혁 12개조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민씨 세력은


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텐진조약(청과 일본 사이의 조약으로 한 나라가 조선에 파병할 때는 상대방에게 통보해야 한다는 내용)에 따라


일본도 일본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파병 했습니다.




외세의 침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자


전봉준은 외세를 축출하기 위해 다시 봉기합니다.


10월 말을 전후해 전라도 삼례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11만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동학교도들(북접)은 무력항쟁에 가담하기 꺼려했으나


오지영의 조정으로 손병희의 지휘하에 1만 명의 북접 동학농민군이 청산에 집결했습니다.



우금치 전투에서 6~7일간에 걸쳐 40~50회 격전을 치루었으나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크게 패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근대화와 자주화라는 두가지 가치를 실현해야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위정척사운동으로는 근대화를 이룰 수 없었고

개화 운동으로는 자주화를 이룰 수 없었기 떄문에


동학농민혁명이 추구한 반봉건 반외세의 구호가 대안이었습니다.



이곳 동학혁명기념관은


전반적으로


설명이 굉장히 자세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글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공부하는셈 치고 돌아다니는거라


한참동안 서서 읽었지만


보통은,, 잘 읽지 않을


디자인 & 글자크기였습니다.


..


전시관의 목적이


동학 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있다면,,


조금 더 간략하게 전달하는 방법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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