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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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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홍예문 홍예문은 1908년에 세워졌습니다. 철도 건설을 담당한 일본 공병대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인근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늘어나자 산 너머로 영역을 확장하기 위헤 세워졌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사고 위험이 커보이긴했는데 아예 차량 통행을 막고 사람만 다니게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니다.
[인천] 내동교회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성공회는 1890년 코프 주교와 랜디스가 인천에 도착하면서 시작됩니다. 현재의 건물은 누가병원으로 사용되던 곳에 세워졌습니다.
[인천] 내리교회 우리나라 감리교의 발상지 내리교회에 다녀왔습니다. 내리교회는 1885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건물은 1984년에 다시 증축된 것 같습니다.
[인천] 답동성당 인천개화거리를 둘러보고 근처에 있는 답동성당, 내리교회, 내동교회로 향했습니다. 걸어가기에는 조금 애매한 거리이긴한데 구경삼아 돌아다녔습니다. 근처에 신포국제시장이 있덜구요 시장에 있는 분식집에 들러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다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답동성당 답동성당은 1889년에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의 성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37년 증축된 모습입니다.
[인천] 짜장면박물관 인천 짜장면박물관 화교역사와 짜장면에 대해 전시되어 있습니다. 1914~1949년 사용되었던 공화춘 회계장부 한국의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광동성 수사제독 오장경의 군대와 함께 들어온 상인 40여 명이 체류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청나라는 1883년 말부터 영사 업무를 시작하였고 이 때부터 인천에 많은 중국인들이 건너옵니다. 현재 차이나타운이 위치하고 있는 중국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는 개항기부터 화교들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청관'이라 불리며 상가와 요릿집들이 들어섭니다. 광복 후 정부가 화교의 경제권 확장을 제한하면서 위축되기도 했지만 1990년대 한중수교를 계기로 성장합니다. 화교들은 외국에 정착할 때 주로 음식점, 양복점, 이발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890년대를 전..
[인천] 개항박물관 인천개항박물관 이 건물은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은 해관세와 한국에서 생산되는 금괴 및 사금의 매입업무를 대행합니다. 이후 예금과 대출 등 은행 고유의 업무를 담당하게됩니다. 이곳 개항박물관은 개항기 인천 지역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1888년 인천에는 대불호텔이 일본인 사업가에 의해 건립됩니다. 당시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에 인천으로 통해 서울로 이동하는 외국인이 주로 이용했습니다. 1899년 9월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투숙객이 줄어들었고 1918년 경 중국인에게 매각되어 중국음식점으로 활용됩니다. 1978년 철거되어 현재는 빈 터만 남아있습니다. 1918년 갑문 설치 이후 월미도 일대는 풍치지구로 지정되고 임해 유원지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1923년 월미도..
[인천] 근대건축전시관 인천 근대건축전시관의 전시 내용입니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본래 일본18은행 인천지점 건물이었습니다. 1890년 세워진 이곳은 18은행이 해외에 세운 최초의 지점이었습니다. 나가사키의 상인들은 상해에 수입된 영국 면직물을 수입해 그것을 한국에 팔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이들의 업무를 지원하고자 18은행 인천지점이 새워졌습니다. 개항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로 배를 대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곳에 선박을 정착시키기 위해 부두를 짓는 공사가 1884년 시작됩니다. 인천항 도크는 1906~1918년 사이에 설치됩니다. 인천항 도크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크이자 당시 동양에서 하나뿐인 도크였습니다. 일본 경도대학 문학부 지리학과가 소장하고 있는 1916년 제1..
[인천] 한중문화관 - 화교역사관 인천 한중문화관 화교역사관에 전시된 내용입니다. 화교사회는 1882년 조선과 청 간의 무역협정이 체결되면서 시작됩니다. 화교는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됩니다. 화인은 현지의 국적을 취득해 중국 국적을 지니지 않은 집단 화교는 중국의 국적을 그대로 유지한 집단 화예는 자신을 현지교민사회의 일원으로 인식하지 않지만 문화적으로 중국으로부터 건너왔다고 생각하는 집단입니다. 한국 화교는 90% 이상이 산동성 출신입니다. 남성 위주의 이주 후 한국인과의 결혼을 통해 가족을 이룬 경우가 많았습니다. 1884년 4월 인천에 청국 조계지가 들어섭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뒤 중국조계지가 위축되었습니다. 1990년대 세계화의 추세와 한중 수교를 계기로 인천은 대중국 교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합니다.
[인천] 한중문화관 - 한중교류사 인천에 있는 한중문화관, 한중교류사 관련 전시 내용입니다. 한중 문화 교류는 기원전 3~4세기 경부터 시작됩니다. 이후 전쟁과 평화로운 교류를 통해 경제, 사회, 문화적 교류가 이어집니다. 냉전기에는 교류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이후 중국이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하며 한중 교류가 급진전됩니다. 장보고는 819년 당나라의 장군이 되었다가 다시 귀국해 신라 왕실의 승인을 얻고 해적과 노예상을 소탕합니다. 장보고는 동북아시아의 해상권과 무역권을 제패해 한중교류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18세기에 등장한 북학파는 청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합니다.
[인천] 한중문화관 인천 차이나타운거리에 있는 한중문화관의 모습니다. 한중문화관 건물은 총 4층으로 1, 2층에 전시실이 있습니다. 연중무휴이고 9시부터 18시까지 관람할 수 있습니다. 관람료 한중문화관 우호도시홍보관에는 중국의 여러 도시로부터 기증받은 물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요녕성 영구시 산동성 청도시 시남구 산동성 치박시 박산구 내화예술로 만들어진 작품 수공유리조각공예품 산동성 제녕시 미산현 중국전통의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습니다. 단체의 경우 미리 예약을 해야한다고 하네요. 청나라 황제, 황후의 의상 명나라 황제, 황후의 의상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인천의 근대문학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인천의 근대문학 관련 전시내용입니다. 인천은 최초로 개항된 항구도시로 외래의 근대문화가 들어오는 통로였습니다. 인천은 근대적 여가와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1917년에는 월미도와 내륙을 잇는 방파제가 완공되었고 1923년 '월미도유원회사'가 설립되어 인천은 관광지로 각광받기 시작합니다. 최찬식의 '해안'(1914), 염상섭의 '이심'(1928), 이효석의 '주리야'(1933), 이광수의 '사랑'(1938) 에 이러한 인천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개항 이후 인천은 공업도시로 발전합니다. '인간문제'(1934), '재생'(1924), '당랑의 전설'(1940)에 이러한 인천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전쟁직후 인천은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도시로 발전합니다. 현대문학은 인천을 배경으..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1945~1948 인천 한국근대문학관에 전시된 1945~1948년 관련 전시내용입니다. 해방이후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정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우익과 좌익의 대립이라는 냉전체제가 형성되면서 문인단체도 좌우로 나뉘게 됩니다. ‘전조선문필가협회’(우), ‘조선문학가동맹’(좌)로 나뉜 문학계는 이후 남과 북으로 많은 작가들이 나뉘게 되는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이 시기 문학은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고, 친일 행위를 반성하거나 당대의 혼란한 현실을 담고,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개성을 다루는 특징을 띄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육사, 윤동주, 박물월, 박두진, 조지훈 등의 시집이 등장합니다. 또한 해방 직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상, 친일 작가의 자기비판, 등을 내..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1935~1945 인천 한국근대문학관에 전시된 내용입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한국 근대문학은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을 받습니다. 각종 신문과 잡지가 폐간되었고 한글 사용도 금지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가족사연대기소설들이 발표되었습니다. 백석, 이용악, 서정주, 오장환, 유치환 등의 시인이 등장합니다. 1930년대 후반 생명파 시인이 등장합니다. 서정주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원죄 의식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동경을 관능적인 이미지로 그려냅니다. 대표작은 ‘화사’, ‘자화상’ 유치환은 현실과 대결하는 생명 의지를 추구합니다. 대표작은 ‘생명의 서’ (1938), ‘바위’(1941) 오장환은 과거의 잘못된 유산과 전통을 부정하는 한편, 항구와 바다 등의 생동하는 공간을 이국적이며 퇴폐적인 이미지로 그려냅니다. 대표..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1925~1935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1925년에서 1935년 근대문학에 대한 전시 내용입니다. 1925년부터 1935년 사이에는 식민지 조선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과 농촌의 삶과 애환을 다룬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김유정의 ‘봄 봄’(1935), ‘동백꽃’(1936)과 심훈의 ‘상록수’(1935), 이기영의 ‘고향’ (1933), 이광수의 ‘흙’(1932)이 있습니다. 염상섭은 1930년대 장편소설 ‘삼대’(1931)를 발표합니다. 이기영의 ‘고향’(1933)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편 농민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농촌의 생활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강경애는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를 통해 농민에서 노동자로의 변신과 식민지 시대 여성의 삶을 다루었습니다. 한설야는 ‘황혼’(1936)을 통해..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1919~1925년 인천 한국근대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20년대 초반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창조’의 김동인과 ‘백조’의 현진건, 나도형 그리고 ‘폐허’의 염상섭을 들 수 있습니다. 김동인은 과거 시제 및 과거형 종결어미, 3인칭 대명사 등을 소설의 문장에 대입해 근대소설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마음이 옅은 자여’ (1919), ‘배따라기’ (1921), ‘감자’ (1925) 등이 있습니다. 현진근은 ‘빈처’ (1921)와 ‘운수 좋은 날’ (1924), ‘고향’ (1926) 등을 통해 식민지 현실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지식인과 노동자, 농민의 궁핍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나도향은 초기에는 감상적 낭만주의 모습을 보이다가 ‘벙어리 삼룡이’ (1925), ‘물레방아’ (1925)를 통해..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 1910년대 인천에 있는 한국근대문학관 1910~1919년도 문학 일본에서 근대문학 수업을 받은 유학생들은 시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최조의 산문 자유시 ‘불놀이’(1919)가 발표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1910년대에는 일제의 검열과 규제 속에서 신교육과 자유연애, 근대문명 예찬 등을 내용으로 하는 작품들이 자리잡습니다. 또한 무기력한 지식인의 우울과 고뇌를 묘사한 단편소설들도 발표됩니다. 외국 문학을 우리 상황에 맞게 각색한 번안소설이 크게 유행하게도 합니다. 1917년 매일신보에 견재된 이광수의 ‘무정’은 1910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이전 소설과 달리 구체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현실성 있는 인물과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최초의 근대 창작 장편소설 ‘무정’ 1920년대에는 3.1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