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간첩들이 시위를 주동? 유도?한다는 이야기들이 군부대가 진입할 때부터 나돌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는게 아닐까.
그런데 5.18. 관련 책자를 보다가 약간은 의문나는 점이 생겼다.
광주광역시5.18사료편찬위원회에서 2014년 7월에 낸 책자인데,
'시간대별로 보는 1일간의 5.18민주화운동'에 보면
19일 16:30에 최초 발포가 있었고, 20일 23시에 다음 발포가, 21일 13:00에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이 시작되었다.
이 내용만 보면 19일과 20일에는 전면적인 발포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이 시작된 21일 13시 이후 흔히 말하는? 시민군이 조직되었다.
14시 35분에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과 장갑차를 획득했고,
14시 40분에 TNT를 입수하고
16시에 화순과 나주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해 도청앞에서 시가전을 벌였다고 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나 신속한 대처이고 준비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계획하지 않고서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읽다보면 알게 되겠지..?!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이다.
그날의 이야기들을 직접 적을 수는 없고 그날의 이야기들을 모두다 보고 있었던 무등산을 담고 있다.
...
섬뜩.
계엄사령부는 헌법을 초월할 수 있는가보다...
정치활동 중지
집회 및 결사의 자유 없음
언론의 자유 없음
출판의 자유 없음
영장이 없는 인신 구속 가능
...등등등
북괴랑 같은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잡아가면..
지구는 돈다라고 하면 잡아가겠군.
국가 원수가 왕인줄 아나 보군.
다른 나라 독재 정권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요구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이걸 집어든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이걸 집어든 30여 년 뒤의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까.
법을 공부한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을 덮어두었던 태극기.
영창 건물이다.
철거되기 전에는 이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원래 위치에서 100m정도 이동해서 복원했다고 한다.
서대문 형무소에도 이런 유사한 구조가 있었다.
20세기에 유행?한 구조인가보다.
지금도 이렇게 관리하려나? 잘 모르겠다.
[광주] 5.18 기념공원
2014.9.28.
518번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이동했다.
참고로, 광주의 518번 버스는 518 관련 사적지를 두루 지나간다.
518 관련 희생자들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공원 한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오월루.
올라가 봤는데 높은 건물들이 많아서 경치가 좋지는 않았다.
⬇︎ 518 사적지를 다니면서 가져온 자료들.
이 책을 어디서 가져왔더라? 가물가물한데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사진 자료도 많이 있고 부록부분에는 사건이 시간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다.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참 많은 사람들이 폭력을 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수많은 시위와 투쟁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시위, 단식투쟁, 성명서 발표, 동맹휴학 등등 온갖 걸 다 해서야... 특별법이 제정되고 대법원의 판단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쿠데타를 하고 정권을 잡기위해 폭력을 행사해도 이렇게 정상화시키기가 어려운데, 요즘같이 평화로운 시대에 뭔가 기득권에 반하는걸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살아가는게 속 편한 일이려나.
[더 보기를 누르면 이 책을 보고 정리한 내용이 있다.]
10∙26 사건에 대한 이야기와 12∙12 쿠데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광주민주항쟁.
◎ 12∙12쿠데타
박정희 사후 진상조사를 위해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졌는데 이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이 본부장을 맡게 되어 정보∙보안∙수사 업무를 맡게 되었다. 군의 정치 비개입을 추구하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과 생각을 달리 하는 소장파 장교들에 의해 12∙12 쿠데타가 진행되었다. 이 중심에는 '하나회'라는 군내 사조직이 있었다. 당시 주요 야전부대 지휘관이었던 '하나회' 소속 장교(장성이 다수)들은 예하 병력을 동원해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는 것을 시작으로 총리공관(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있던 곳), 국방부, 육군본부를 장악했다.
◎ 쿠데타 이후 전두환의 행적
쿠데타 이후 전두환은 중앙정부부장을 겸직하며 내정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K-공작계획'을 통해 여론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또한 시위 진압에 특화된 훈련(충정훈련)을 실시하여 국민의 시위에 대비했다.
◎ 쿠데타 이후 학생과 정치권의 움직임
당시 대학생들은 군부가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기위해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갔고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높았다. 정치권에서는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무력시위만 행사하지 않으면 신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4일 서울지역 학생들은 일제히 가두시위를 시작했으나 병력 이동 정보를 입수한 이후 충돌을 우려하여 시위를 그만 두었다(서울역 회군). 이런 움직임에 따라 정치권도 정국의 변화를 도모했다. 신민당(당시 야당)은 소속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비상계엄해제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공화당(당시 여당)도 동조하는 분위기로 5월 20일 경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신군부는 권력을 유지할 방안을 도모했다.
◎ 5월 17일
신군부는 17일 계엄을 확대하고 포고령 10호(위의 사진 중에 있음.)를 발표해 정치활동 금지, 집회 및 시위 금지, 언론 검열 등의 조치를 시행했고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연행하였다. 국회에서 계엄확대안을 의결하기도 전에 이미 시위 진압을 위해 훈련된 충정부대의 배치가 시작되었고 군은 각 대학으로 진주하였다.
◎ 5월 18일
18일 전남대 앞에서 처음으로 시위대와 공수부대의 충돌이 있었다. 충돌이라기보다 진압. 이 날 이 곳 뿐 아니라 금남로와 충장로 등지에서도 시위 진압이 있었다. 여러차례 충돌이 있었지만 대부분 강경진압에 의해 금방 진압되었다. 2군사령부의 ⌈계엄상황일지⌋에 의하면 18일 하루 연행자가 405명이었고 이 중 68명이 부상, 12명은 중태라고 한다.
◎ 5월 19
일
18일과 19일 사이 11공수여단 병력 1100여 명이 추가로 광주에 도착했다. 19일에는 일반 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들었다. 이번에도 경찰과 공수부대가 최루탄을 이용해 해산을 유도했다. 그러나 여의치않자 전날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폭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이날은 전날과 달리 남여노소 다양한 시민들이 있었지만 가리지 않고 폭력을 행사했다. 이 때부터 광주 시내의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당시 통제받고 있던 언론은 광주 사태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고 정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 5월 20일
19일과 20일 사이 3공수여단 병력 1300여 명이 추가로 광주에 도착했다. 20일에도 수만 명의 시위대가 금남로에 모였다. 역시 전날과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시위 진압이 이어졌다. 택시기사들이 택시를 타고 와서 자동차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진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MBC와 KBS 건물에 시민들이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날 밤 11시 경 광주역에서 최초로 발포가 있었고 비슷한 시각에 광주세무서와 조선대 부근에서도 발포가 있었다.
◎ 5월 21일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광주사태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한다.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방화∙선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오후 1시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겨냥한 사격이 시작되었다. 이후 5공 청문회 때 이 때 발표명령이 어디서 내려진 것인지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한채 미제로 남아 있다. 이 때의 총격 이후 시민들도 무장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 20분경부터 응사가 시작되었고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결국 계엄군은 퇴각했고 시민군은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이 때 광주에 거주하던 약 200여 명의 미국인은 송정리로 나가 군용기를 이용해 서울로 피신하였고 미공군은 모든 비행기를 군산과 오산으로 이동시켰다.
◎ 5월 22일-25일
시민군은 전남도청을 근거지로 정비했고 계엄군은 광주와 외부와 연결되는 도로를 차단하고 시 외곽의 야산에 매복하여 왕래를 차단했다. 시민들은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국내 언론보다 외신기자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이에 따라 외국인 기자들에게 취재의 기회가 많았다. 시민들 사이에서도 강경파, 온건파, 협상파 등의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 5월 26일-27일
26일 새벽 5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광주 시내로 진입했다. 당시 도청에는 최후까지 남기로 한 15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26일에서 27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계엄군의 작전이 시작되었고 1시간 30분만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5∙18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어져 내려온 민중항쟁의 전통을 계승∙발전시켰다.
2. 민중이 민족사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3. 인간의 자연권인 저항권의 정당성을 공인받았다.
4.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부정하는 계기가 되어 그 체계를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책을 통해서 5∙18에 대해 보다 세세히 알게 된 것 같다. 이 전에는 MBC에서 했던 드라마 '제5공화국'을 통해 배웠었는데 그 드라마를 보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여행가기 전에 이런 자료를 구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늘 가야 있다는게 아쉬운..
지나다니다보면 관광안내소 같은게 종종 있는데, 거기에 그 지역 뿐 아니라 전 지역의 관광 안내 책자가 비치되어 있으면좋겠다.